서울시립미술관 웹사이트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소장한 5654점(2022년 8월 기준)의 미술작품 정보가 공개되어 있다.
'작가명', '작품명', '재료/기법', 부문, '제작연도', '수집연도', '기증여부', '전시여부' 라는 총 8개의 카테고리로 세분화하여 작품을 검색할 수 있으며, 이 중 '부문', '제작연도', '수집연도', '기증여부', '전시여부' 총 5개의 카테고리는 각기 세부항목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구조를 갖춘 정보체계를 이루고 있다.
'작가명'과 '작품명'은 하위 항목 없이 검색창으로만 검색할 수 있는데, 이들이 예술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이자 또 각기 다른 고유한 값(이름)을 가진 정보이기에 하위 목록을 나누는 검색 방식은 적절치 않을 수 있다고 짐작해 본다.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바로 '재료/기법' 정보다. 언뜻 보기에는 충분히 범주화(카테고라이징) 될 만하게 보이는 이 재료/기법(그것도 재료와 기법이 합쳐 있다.)란 역시 작가명이나 작품명처럼 (정해진 하위 항목 없이)단어를 입력하는 검색창으로만 검색이 가능하다.
자칫 방문자는 재료/기법 검색란을 앞에 두고 길을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또 이것이 일률적인 몇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 가능한 항목은 아닐 수 있다는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발간한 <소장품 기술 지침> 책자에 따르면 소장품 정보 기술 체계에서는 재료/기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분류 및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재료와 기법을 함께 기술하며, 너무 광범위하고 전문적인 사항들은 소장 작가들의 자문을 받아 정리하였다. 평면(회화Ⅰ, 회화Ⅱ, 서예, 드로잉, 판화, 사진) 작품은 바탕재료와 표현재료를 구분하여 기술하고, 입체(조각∙설치, 공예) 작품은 주재료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영상(뉴미디어)작품은 재생 정보를 중심으로 기술한다. 단, 작가가 원하는 방식이 있다면 우선으로 반영하여 기술하고, 기술지침에 따라 생략된 세부적인 사항들은 소장품 담당자가 반드시 따로 기록하여 관리하기로 한다.”(p.5)
재료와 기법에 관한 설명이 있지만 작가의 의사가 우선적으로 적용되고, 지침에 따라 분류할 수 없는 재료나 기법들이 많아 보인다. 특히 뉴미디어 작업의 경우 분류 체계에서 명시하고 있는 작업 형태는 '영상'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따라서 영상 외에 사운드, 인터랙티브 설치, 웹 작업 등 다양한 형태와 재료의 뉴미디어 작업들을 지침서에 따라서는 포괄하지 못하게 된다. 재료/기법 데이터에 접근하는 방법은 꽤나 어렵고, 이 데이터가 구축된 방식에는 빈틈이 많아 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 목록 데이터 중 재료/기법 정보의 특징은 1)범주화(categorizing)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2)검색이 어렵다, 그리고 3)비슷하지만 다른 표현으로 기술된 것들이 많다(예: '렌티큘러', '렌티큘라', '캔버스에 유채', '캔버스 위에 유채'), 4)'빅 데이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재료 및 기법 항목에 편중되어 있다 등으로 분석할 수 있겠다.
'세마 코랄'에서 서울시립미술관의 재료/기법 데이터를 사용한 작품을 내게 의뢰했을 때, 나는 재료/기법 정보의 '데이터'로서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했다. 실제로 빅 데이터인 이 정보들은 앞서 기술한 특징들로 종합해볼 때, 데이터 사이언스에서 분류하는 '비정형 데이터(unstructured data)'라고 말할 수 있다.
작품 기록에 있어 필수적인 정보로써 수집되지만, 그 비정형성 때문에 재료/기법 데이터는 검색이 용이하지 않고, 따라서 데이터에 접근하려는 사용자들에게 접근 가능성 및 사용성이 떨어진다.
이렇게 데이터의 사용성 및 접근성이 떨어지게 되면 데이터의 가치와 활용도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데이터 사이언스 분야에서 분석이 힘든 비정형 데이터를 재조명하며 그것의 잠재적인 가치를 찾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처럼, 데이터를 다루는 예술 작업에 있어서도 비정형 데이터의 잠재성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의 존재 가치를 떨어뜨리는 이 '비정형성'을 오히려 데이터를 가치 있게 하는 '고유한 개성'으로 바꿔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 생각은 재료/기법 정보를 정제해보면서 더 뚜렷한 그림으로 발전해나갔다. 데이터 분석을 돕는 프로그래밍 언어 중 하나인 파이썬(python)을 이용하여 5654점의 작품들에 할당된 각기 다른 재료/기법 데이터를 정리해보았다.
같거나 중복된 값(정보)은 하나로 합치고, 각각의 값들은 쉼표(,)를 기준으로 구분하였다. 다소 간단한 방식으로 정제되어 나온 재료/기법의 리스트는 결과적으로 1627개가 되었다.
비슷한 재료나 기법을 설명하는 이름이라도 단어 표기가 다르면 다른 것으로 분류하였다. 쉼표를 기준으로 구분하였기 때문에 괄호'()' 및 세미콜론':'등의 문장 부호들이 단어에 딸려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의도적인 개입을 최소화하여 데이터를 정제하기 위해서 이런 부분은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정제된 데이터를 웹 페이지의 캔버스 위에 죽 나열해 보았다.
파이썬 프로그래밍을 통해 정리되고 랜덤한 순서로 나열된 1627개의 재료/기법 정보들이 일렬로 열거된 모습을 보니 각각의 이름들은 기존에 작품을 설명하는 '부수적인 역할'을 하던 '재료', '기법'의 역할이 벗겨진, 그냥 그 자체로 독특한 단어들의 조합처럼 보였다.
서로에게서 분리되고 순서도 뒤섞인 재료/기법을 표현하는 단어들은 빈 캔버스 위에서 이제 그 자체로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단어들이 되었다.
이 단어들이 자신의 이름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캔버스에 유채'라는 말은 더 이상 캔버스 위에 유채물감을 그렸다는 정보를 서술하지 않고, 그 자체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대변하는 단어의 조합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 비어 있는 단어들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
최근 AI 분야에서 활발히 개발되고 사용되는 'text to image' 프로그램 중 kakaobrain에서 오픈소스로 공개한 minDALL-E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아직까지 개발 중인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보통은 영어 문장을 다양한 형식의 그림으로 표현해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프로그램에 한글 단어들을 집어넣어도 어떤 이미지들이 결과로 도출되는 것을 발견했고, 따라서 minDALL-E를 사용하여 컴퓨터가 재료/기법 데이터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해주도록 시도해보기로 했다.
때때로 영어로 표기된 재료/기법 정보들은 그 단어의 원래 뜻에 어느 정도 연관되어 보이는 이미지들이 결괏값으로 도출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글 단어로 된 대부분의 재료/기법 정보들의 그림 결과는 매우 기이했으며 도무지 기존의 한글 단어에 부여된 의미와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이 알 수 없는 이미지의 그림들은 의도와 맥락이 생략되어 나열된 재료/기법 단어들과 썩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본래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해체되어 웹에 둥둥 떠 있는 이 단어들은 알고리즘을 알 수 없이 생성된 이미지들과 조우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단어와 의미가 새롭게 연결되는, 그러면서 새로운 가치가 생겨나는 순간이 이 웹에서 일어나는 게 아닐까.
마우스를 이름 위에 가져갈 때 각 재료/기법에 해당하는 고유한 이미지가 화면 위에 떠오른다.
그러나 단어를 클릭하는 순간, 서울시립미술관 웹사이트의 재료/기법 검색창에 선택된 단어로 검색된 결과 창으로 들어가게 된다.
새롭게 부여된 재료/기법의 이미지 데이터는 가상의 존재이며 찰나의 데이터이다. 이 단어들은 마우스의 클릭을 통해 결국 실제 재료/기법 기능을 하는 데이터로서의 (본래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면서 실제의 작품과 연결된다.
데이터로서 단어가 연결된 맥락과 분리되고 그것의 조합으로부터 해체되었을 때, 이 데이터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잠재성이 있다.
비록 그것이 비정형화되고 가치나 쓸모가 없게 여겨지는 데이터라도 말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 목록 데이터의 재료/기법 정보를 다루면서 비정형 데이터의 잠재적 혹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시도를 해 보았다.
모든 것이 데이터화 되고 정보화되는 시대, 미술작업 역시 갖가지 데이터의 조합으로써 분석되고 처리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지지만, 그 과정에서 비정형화된 데이터가 쓸모없는 데이터가 아닌 주체적이고 고유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지점을 고민해 본다.
더 많은 실험과 시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